[생명의 窓] 길 위의 시편들/이재무 시인

[생명의 窓] 길 위의 시편들/이재무 시인

입력 2016-11-25 17:50
수정 2016-11-2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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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나는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잠깐의 시기를 빼놓고는 정규직으로 살아 본 적이 없다. 서른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여러 대학을 전전해 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내 시편 중 상당수가 길 위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버스와 기차와 전동차 안에서 나는 틈을 내어 책을 읽었고, 차창 밖을 스쳐 지나는 풍경들을 일별하다 도둑처럼 불쑥 찾아온 시상을 재빠르게 메모해 두었다가 집으로 돌아와 구성하고 또 재구성한 뒤 정리한 것들을 갈무리해 두었다. 또는 무료하게 수업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교정 벤치에 앉아 공상에 젖기도 하고, 멍하니 호수와 나무, 꽃과 구름 그리고 캠퍼스 울타리 너머의 웅기중기 솟아 있는 크고 작은 가옥들과 건물들을 계통 없이 바라보면서 두서없이 잡념에 시달리기도 하였는데 그렇게 하찮게 보낸 시간도 더러는 시가 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산책길에서 시상을 주로 구하고 있다. 이 버릇은 십 년 전 여의도에 살 때 생긴 버릇인데 아마도 나는 뒤늦게 찾아온 이 습관을 평생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아시다시피 여의도는 한강을 양 옆구리에 끼고 형성된 지역이다. 이 지역적 특성이 내게 산책의 일상을 선물로 안겨다 주었다.

한강변을 거니는 이유가 꼭 건강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무엇보다 그것을 이겨 낼 방편으로 걷는 일에 몰두하였다. 외로움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잘 다스리면 사유의 폭과 깊이를 안겨다 주지만 잘못 다스리면 치명적인 상처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영 못쓰게도 만들어 버린다. 외로움으로 인해 인간은 얼마든지 추해지거나 망가질 수 있는 것이다.

걷다 보면 내 몸 안에 나도 모르게 적층되어 온 감정의 불순물들이 시나브로 빠져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또 나는 걸으면서 깜냥껏 살아온 내 과거와 해후하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앞당겨 만나 보기도 한다. 걸으면서 노변의 길고 억센 수염처럼 돋아난 풀과 도열한 나무들과 서해를 향해 완만하게 걸어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자주 형상을 바꾸며 떠다니는, 하늘 정원의 구름을 올려다보고 또 오가는 행인들의 각기 다른 몸짓들과 표정들을 읽기도 하고, 한가하게 낚싯대를 드리운, 시간을 초월한 강태공들의 여유를 쳐다보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또 큰비가 온 다음날은 길가에 파인 웅덩이(물거울)를 다녀가며 화장을 고치기도 하고 마른 목을 축이기도 하는 온갖 사물들 예컨대 떠도는 구름, 언덕의 나뭇가지, 꽁지 짧은 새 등등을 훔쳐보기도 한다.

이렇게 걷다 보면 불쑥 충동처럼 혹은 은폐된 신의 선물처럼 몸 안에 내재한 시 이전의 어떤 감정의 덩어리가 몸 밖으로 갑작스레 튀어 올라올 때가 있다. 나는 이것들이 나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행여나 토라져 달아날까 봐 어르고 달래며 신줏단지 다루듯 조심스럽게 집으로 데리고 와서 컴퓨터 속에 고이 모셔 놓는다. 간간이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예의 모셔온 그분들을 꺼내어 정성들여 곱게 화장을 시킨 후 시의 옷을 입힌다. 이렇게 앞태도 살피고 뒤태도 살펴 성장시킨 그들을 대기시켰다가 잡지사에서 초청이 오면 고이 보내드린다. 아니다. 초청이 와서야 부랴부랴 급하게 그들을 화장시키고 성장시켜 서둘러 보내는 경우가 더 많다. 이렇듯 나의 시편들은 길 위에서 쓰여진 것들이 태반이다.
2016-11-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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