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소풍] 전북 남원 최명희 혼불문학관

[경건한 소풍] 전북 남원 최명희 혼불문학관

입력 2011-12-18 00:00
수정 2011-12-1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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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 최명희 혼불문학관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


우리는 빛에 살고자 합니다. 그믐의 어둠을 벗어나 보름의 빛 아래, 삶을 뿌리내리고 싶습니다. 이런 세상에 “그믐은 지하에 뜬 만월(滿月)”이라 외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땅 위의 둥치와 가지 모양 그대로 반대편 땅 속에 뿌리를 뻗는 나무처럼, 보름의 달은 지상에 뜨는 온달이요, 그믐의 달은 지하에 묻힌 온달이라 했었지요. 어둠의 골짜기에도 나무가 자라고 물고기가 살고 새들이 날아들기에, 그에게 어둠은 결코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열두 번째 경건한 소풍지는 생명의 온기를 품은 혼불의 도시, 남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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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 정신의 기둥 하나 세울 수 있다면.” 소설 <혼불> 작가의 후기 중에서, 최명희.

<첫째 날> 10:30-13:30 혼불문학관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그는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눈을 팔았다. 갚을 길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그렇게 울면서 쓰기 시작한 소설 <혼불>. 이 작품은 소설가 최명희(1947~1998)가 자신의 혼불을 태워 만든 역작이다.

혼불은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이라는 뜻의 전라도 말이다. 죽기 얼마 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전해진다. 혼불이 몸에 있으면 산 것이고 없으면 죽은 것이니 존재를 지탱하는 핵과 다름없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요,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라 믿었던 최명희는 시대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알맹이를 뿌리고자 <혼불>을 쓰게 됐노라 밝힌 바 있다. 남원을 배경으로 몰락하는 양반가의 며느리 3대를 다룬 이 소설은 집필기간만 스무 해에 가깝다. 최명희는 지병인 난소암을 숨기면서까지 집필에 몰두했지만, 끝내 <혼불>을 다 쓰지는 못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더 애잔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 참으로 잘 살고 갑니다.”

자연은 위대한 영혼을 낳기도 하지만, 위대한 영혼 또한 자연을 빛나게 하는 걸까.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혼불문학관(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은 퍽 아름답다. 이 마을은 문학관뿐 아니라 소설에 등장한 종갓집, 새안바위, 달맞이동산, 청호저수지, 구(舊) 서도역 등이 남아있어 볼거리가 많다. 특히 1932년 지어진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조 건물 역사인 구(舊) 서도역은 2006년 철도가 이설되면서 철거 위험에 처했지만 남원시가 매입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보존되어 있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꾸불꾸불한 혼불 마을길 구석구석을 두어 시간 걸었다. 돌아서려는 걸음을 자꾸 붙잡은 건 최명희의 물음이었다. ‘혼불 없는 껍데기만 가지고 살고 있진 않는가?’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14:30-18:00 <춘향전> 유적지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이히 이히 히이 내 사랑이로다’ 노래하며 애간장 녹이던 광한루, ‘꿈같은 고개 저절로 숙여지고 구름 같은 머리가닥 시사아롱 흘러지며’ 쓰라린 이별하던 오리정, ‘지난 해 어느 때에 낭군과 이별했던고. 찬비는 내리는데 어찌 남원 옥방에 죄수가 되었는고’ 사무치게 서러워하던 옥사정, ‘금술통의 맛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맛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탐관오리를 꾸짖는 동헌까지, 남원은 실로 춘향과 몽룡의 고을답다.

춘향과 몽룡의 이름을 딴 지명은 흔하지만, 막상 가보면 실체가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것이 춘향이 고개와 이도령 고개. 오리정에서 몽룡을 보낸 춘향이 버선발로 쫓아간 곳이 춘향이 고개의 설화지만, 지금은 그저 도로로 남아 있다. 이도령 고개는 전해오는 이야기조차 찾기 어렵다. 그저 오리정(전북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에 올라 애끓던 둘의 마음을 헤아려볼 뿐이다. 이름값을 하는 건 광한루(전북 남원시 천거동)다. 세기의 연인이 첫 만남을 한 곳으로 유명한데, 전설이 없더라도 사랑받을 아름다운 누각이다. 특히 꼿꼿하고 청아한 맵시가 연못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밤의 광한루에 있자면, 그 누구라도 연정이 생길 것 같다.

이토록 큰 사랑은 받는 <춘향전>이지만 실화 여부에는 의견이 갈린다. 일단 학계에서는 춘향을 가상의 인물로 본다. 춘향묘(전북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역시 시(市) 차원에서 조성했을 뿐 진짜 무덤은 아니다. 춘향이란 이름이 허구일 뿐 분명 존재했던 일이라는 의견도 있고, 훗날 춘향이 이루어지지 못할 운명을 탓하며 자살한다는 주장도 한다. 허나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떨까. 세월을 거스른 이 사랑 타령이 누군가에게 한 줌의 절절함이라도 남겨놨다면, <춘향전>은 언제나 진행형일 테니까.

<둘째 날> 12:30-17:00 지리산 둘레길(제2코스: 운봉-인월)

정겹다, 먹이 물고 둥지 가는 어미 새의 모습이. 평화롭다, 세상 모든 삐뚠 것을 제자리로 돌린 듯한 말간 풍경이. 동시에 짱짱하기도 했다, 땅에 박힌 모든 생명을 있는 힘껏 밀어 올리는 기상(氣像)만큼은. 지리산을 향해 발을 디뎠다.

지리산 둘레 800리(약 300㎞)를 잇는 국내 최초의 장거리 도보길인, 지리산 둘레길은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00여 개 마을의 옛길, 고갯길, 숲길, 강둑길, 논두렁길, 마을길 등을 이어 하나로 연결한다. 그중 남원은 지리산 둘레길 종주의 시작점이자 마지막 구간으로 1~3코스(약 45㎞)가 이어진다. 운봉~인월을 걷는 제2코스는 오른쪽으로는 바래봉~고리봉의 서북능선을, 왼쪽에는 수정봉, 고남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는 길이다. 대부분 말랑한 흙길과 정돈된 제방길로 여럿이, 편히 걷기 좋은 평지이다. 철쭉 유명한 북천마을, 숲길 시원한 전촌마을, 골목 아담한 비전마을까지 숨 한 번 할딱이지 않고 걸었다. 모난 인생 위로하듯, 길은 계속 둥글기만 하다. 하늘과 땅을 유일한 벗 삼아 옥계호에 도착했다. 결 고운 물빛 위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니 천상의 반짝임이 완성됐다. 그 어떤 보석이 저보다 눈부실 수 있으랴! 어느 곳도 아닌 이 자리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있음에 감동이 밀려온다.

종착지는 달오름마을(인월)이다. 동쪽을 향한 마을 터 덕에,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 곳이다. 이곳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한(황산대첩) 조선의 제1대 왕 이성계가 승전의 이유를 ‘달의 정기’라 믿고 이 마을을 인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낮에는 태양이 달을 대신해 뜨거운 기운을 내뿜는다.

어느새 해가 진다. 갈대의 소살거림과 벼 익은 냄새를 담아온 가방에 달의 기운을 함께 넣었다. 못다 간 가을과 먼저 온 겨울이 서성이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원 소풍 TIP>

전북 남원은 생각보다 먼 소풍지다. 산 위에 있는 도시인만큼, 고개와 터널의 잦은 등장이 피로감을 더한다. 버스나 기차, 자가용 모두 네 시간 넘게 소요된다. 남원은 가을 축제가 다양한 편이다. 음력 9월 9일 전후에 시작되는 흥부제, 10월 초순경의 최명희 학술제, 10월 하순경의 뱀사골단풍제가 그것이다. 신관사또부임행차, 전통혼례, 국악공연 등은 광한루원에서 상설 공연하고 있으니 확인하고 떠나자. 자세한 사항은 남원시청 문화관광과(063-620-6114)와 홈페이지(tour.namwon.go.kr)에서 확인 가능하다.

남원소풍의 참맛은 예상을 피해가는 데 있다. 이런 곳에 시내가 있겠어, 할 때 시내가 등장하고 여기가 광한루일 리가 없지, 하면 옆에 광한루가 나오는 식이다. 남원에 처음 간 사람은 이 의외성 때문에 길을 잃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풍이 끝날 즈음엔 알게 된다. 여행은 맘대로 안 되고 예상을 빗나갈 때, 실로 굉장한 일이 된다는 것을!

글·사진 송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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